동국대 WISE캠퍼스 인문도시사업단, 승효상 건축가 초청 경주학 특강 성료
땅에 새겨진 삶의 무늬 ‘지문(地文), LANDSCRIPT’를 읽다… 건축가 승효상의 건축 미학

동국대학교 WISE캠퍼스(총장 류완하) 인문도시사업단이 지난 23일 교내 원효관 글로벌에이스홀에서 명사 초청 특강을 개최했다.
이번 경주학 특강은 단순히 건물을 짓는 기술로서의 건축이 아닌, 인간의 삶과 역사를 담아내는 ‘인문학으로서의 건축’을 재조명하기 위해 마련되었다
이날 강연장에는 경주 시민, 교수, 학생 등 120여 명의 청중이 참석하였다. 특히 현장에는 경주를 무대로 활동 중인 소산(小山) 박대성 화백이 참석해 자리를 빛냈다. 두 거장은 경주 솔거미술관의 인연을 바탕으로 이번 특강에서 뜻깊은 재회를 나누며 현장에 훈훈한 감동을 더 했다.
■ 땅의 무늬 ‘지문(地文)’, 터무늬에 새겨진 삶의 아카이브
승효상 건축가는 “건축은 기술도 예술도 아닌 인문학이다”라는 대주제를 바탕으로, 자신의 건축 철학을 관통하는 핵심 개념인 ‘지문(地文, Landscript)’의 의미를 상세히 풀어냈다.
승효상 건축가의 설명에 따르면 ‘지문’은 한자어 그대로 ‘땅의 무늬’를 뜻하며, 우리말로는 ‘터무늬’라고 일컬어진다. 그는 이것이 단순한 지형이나 땅의 물리적 모양새에 국한되는 개념이 아님을 명확히 했다. ‘지문’이란 오랜 세월 동안 그 땅에 축적된 자연의 기운, 그곳을 거쳐 간 수많은 사람의 발자취와 일상, 겹겹이 쌓인 삶의 기억과 내밀한 감정, 그리고 인간관계의 동선이 총체적으로 누적되어 형성된 거대한 아카이브라는 것이다.
승효상 건축가는 “하늘에 우주의 흐름을 담은 ‘천문(天文)’이 있고, 인간에게 삶의 자취인 ‘인문(人文)’이 있듯이, 우리가 발을 딛고 서 있는 땅에는 ‘지문(地文)’이 존재한다”라고 강조했다. 이에 따라 건축가의 역할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지배자가 아니라, 땅이 품고 있는 지문의 가치를 세밀하게 읽어내고 이를 건축을 통해 서술해 내는 ‘번역자이자 서술자’가 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 의미있는 프로젝트, 자연과의 조화… ‘지문’의 실천
그는 자신의 오랜 건축 여정 속에서 지문의 개념이 어떻게 적용되고 부딪혔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국내 프로젝트를 소개해 청중들의 몰입도를 높였다.
◦ 제주 ‘애월한거(涯月閑居)’: 제주의 ‘애월한거’는 땅의 지문을 고스란히 살려낸 대표적인 성공 사례로 꼽혔다. 승효상 건축가는 인위적으로 대지를 평평하게 깎아내는 대신, 건축물이 들어서기 전부터 그 자리를 지키고 서 있던 오래된 소나무를 있는 그대로 살려 설계를 진행했다. 완성된 건축물은 소나무와 부드러운 조화를 이루었고, 그 땅이 수십 년간 간직해 온 자연의 지문 역시 온전히 보존될 수 있었다.
■ 승효상 건축가 "경주, 불교문화 보편화해 '영성의 도시'로 나아가야"
강연 후 지정 토론에 나선 김용휘 교수가 경주의 공간적·건축적·도시적 방향성에 대해 조언을 구하자, 승효상 건축가는 경주가 가진 땅의 정신과 영성을 바탕으로 한 미래 비전을 제시했다.
땅에 새겨진 정신, '터무늬'의 가치를 존중하고, '영성의 도시' 경주, 발길 닿는 곳마다 탑과 유적이 존재하는 경주의 독특한 특성을 살려, 불교문화에서 비롯된 '영성(Spirituality)'을 미래 도시의 핵심 주제로 삼아야 한다고 제안했다. 궁극적으로는 도시의 모든 요소에 영성이 깃든 '영성의 도시'로 발전해 나가는 것이 경주가 나아가야 할 건축적·도시적 방향성이라고 덧붙였다.
■ 청중과의 질의응답… 경주 문화유산 복원 문제
강연 후 이어진 질의응답 시간은 경주 문화유산 복원을 둘러싼 뜨거운 토론의 장이 되었다. 한정호 교수(동국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는 "지역 사회의 요구로 추진되는 '근거 없는 복원'이 오히려 과거의 진정한 기억을 가리고, 왜곡된 새로운 이미지를 재생산할 우려가 있다"며 이에 대한 강연자의 견해를 물었다.
이에 대해 승효상 건축가는 확실한 근거가 없는 무리한 복원을 '퇴행'이라 규정하며 반대 의사를 분명히 했다. 승효상 건축가는 "현대의 자재와 기술, 현대인의 방식으로 과거의 모습을 온전히 재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주변 환경도 이미 변했다"고 지적하며, 이는 "건축을 박제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이어 "건축을 완성하는 것은 시간"이라며, "과거의 건물을 그대로 모방하기보다는 황룡사가 그곳에 있었다는 '기억의 터'를 보존하여 사람들의 상상력에 맡기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 지역 인문 자산의 대중화를 향한 지속 가능한 발걸음
이번 행사를 기획하고 주관한 동국대 WISE캠퍼스 인문도시사업단은 지난 2024년부터 <경주, 공감문화 상생플랫폼 도시>라는 비전을 가지고 지역 사회 내에서 다채로운 인문학 프로그램을 활발하게 전개해 오고 있다.
인문도시사업단장 홍은숙 교수는 “오늘 승효상 건축가님이 전해주신 메시지처럼, 이번 특강은 경주의 깊숙한 곳에 숨겨진 인문 자산을 새롭게 발견하고 이를 시민들과 함께 가꾸어나가는 소중한 실천의 장이었다”라며 소회를 밝혔다. 이어 “앞으로도 지역 주민들과 함께 경주의 유·무형적 가치를 발굴하고 이를 대중화할 수 있는 고품격 인문학 프로그램을 지속적으로 운영해 나갈 것”이라고 포부를 전했다.
속도와 개발 중심의 현대 사회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터무늬’의 소중함을 일깨워준 이번 경주학 특강은 경주가 가진 인문학적 자산의 미래를 밝히는 뜻깊은 이정표로 남게 되었다.
문의 : 동국대학교 WISE캠퍼스 인문도시사업단 (054-770-4925)